謹按
始祖誕生於脫解王卽位之九年漢光武中元二年得姓金氏名以閼智養爲王子國號鷄林官至太輔聖子神孫世世相承傳于七世而味鄒以助賁王之女婿代沾解王而立元年辛巳漢後帝景耀四年也金氏有國自此始焉 盖鷄林之稱者以金櫝掛樹梢而白鷄鳴於下之義取之也又按鷄林卽始林也先天下而朴氏始祖出焉後天下而金氏始祖又誕而鳥獸率舞人意歸王朴氏而十王昔氏而八王金氏而三十七王又有女王三世則歷傳年譜各從卽位元年計其薨年摁至于千年不足者八年也又按三國本史皆以先王薨年爲嗣王元年高麗臣金富軾撰三國史因以不革然其論曰夫人居卽位踰年稱元此先王不刊之典也以先王終年卽位稱元者非是矣我 睿宗朝史臣徐居正等纂三國史政以君薨明年爲嗣王元年故今於年譜亦以卽位踰年稱元而敢遵春秋一年不兩君之義焉 又按本史其君薨而無嗣則不嫌男女以年長嗣位故朴氏傳于昔氏昔氏傳于金氏三姓一心五十八世各以在位定爲年譜 又按本史國號或稱徐羅或稱斯羅或稱斯盧或稱新羅或稱鷄林而其君初稱居西干又稱次次雄又稱慈充或稱尼師今而至智證王定國號以新羅始爲稱王崔致遠作年代歷皆書王金富軾因本史直之權近作史略從致遠例亦皆書王盖欲變而尊王號也今於年譜亦以王號而年譜之述盖爲金氏同源非金氏王者不書
계림연보(鷄林年譜) 출어동원록(出於同源錄)
삼가 상고해보니 시조(始祖)께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에 탄생하시었다. 김씨(金氏)라는 성(姓)을 얻고 알지(閼智:알은 알이요 지는 존칭이다)라고 이름지어졌다. 탈해왕이 왕자(王子)로 삼아 기르고 계림(鷄林)으로 국호를 고쳤다. 벼슬은 대보(大輔:신라 초기 최고 관직)에 이르렀다. 신성(神聖) 자손들이 대대로 이어져 7대째에 이르러 미추(味鄒)께서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서
첨해왕(沾解王)이 아들 없이 죽자 왕이 되었다. 즉위한 원년(元年)은 임오(壬午:서기 262년) 경요(景耀:초한 후제(後帝) 연호) 5년이다.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개 계림이라고 일컬은 것은 금빛의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아래에서 울고 있는 것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 상고해보니 계림은 곧 시림(始林)이다. 이전에 박씨(朴氏) 시조가 탄생하고 이후에 김씨 시조가 또 탄생하니 새와 짐승들이 다 기뻐 춤추고 민심이 귀부하였다. 박씨는 10왕(十王)이고 석씨(昔氏)는 8왕(八王)이고 김씨는 38왕(三十八王)인데 그 중 여왕이 셋이다. 역대의 연대를 각각 즉위한 원년에서 그 훙년(薨年:왕의
죽음을 훙이라 함)까지로 합계해보면 모두 992년이 된다. 또 상고해보니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다 선왕(先王)의 훙년을 다음 왕의 원년으로 하였는데 고려(高麗)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때 고치지 아니했지만 그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임금이 즉위하고 해를 넘겨 원년을 일컫는 것이 선왕이 정한 만고불변의 전칙이다. 앞의 임금이 돌아간 해에 즉위해서 바로 원년을 일컫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조선 예종조(睿宗朝)의 사신(史臣)인 서거정(徐居正) 등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할 때 임금이 돌아간 이듬해를 후계왕의 원년으로 고쳤다. 그래서 지금 연보(年譜)에서도 즉위한 이듬해를 원년으로 계산함으로써 춘추(春秋)에서 한 해에 두 임금을 쓸 수 없다는 뜻을 따랐다.
또 본사(本史)를 상고해보니 임금이 훙(薨)하고 후사가 없으면 남녀에 구애되지 않고 연장자(年長者)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래서 박씨는 석씨에게 왕위를 전하고 석씨는 김씨에게 전하여 삼성(三姓)이 한마음으로 56대를 누려 각각 재위(在位)한 것으로써 연보를 정하였다. 또 본사(本史)를 상고해보니 국호(國號)를 혹 서라(徐羅)라고 하고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 사로(斯盧)라고 하고 혹은 신라(新羅:신은 음을 새의 취한 것
곧 새라)라고 하였다. 임금의 칭호도 처음엔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또 차차웅(次次雄)이라 하고 또 자충(慈充)이라 하고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 하다가 지증왕(智證王)에 이르러 국호를 신라(新羅)로 결정하고 비로소 왕호를 왕(王)이라고 일컬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지금 불위(不位))을 지으면서 전부 왕이라 썼으나 김부식은 본사대로 썼고 권근(權近)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을 때 최치원의 예를 따라 또한 전부 왕이라고 썼으니 대개 고쳐서 왕호를 존엄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지금 연보에서도 왕으로 쓰고 연보를 서술하는데 김씨로서 한 시조의 왕만을 다루었다. 김씨 왕이 아닌 이는 쓰지 않았다.
謹按
始祖誕生於脫解王卽位之九年漢光武中元二年得姓金氏名以閼智養爲王子國號鷄林官至太輔聖子神孫世世相承傳于七世而味鄒以助賁王之女婿代沾解王而立元年辛巳漢後帝景耀四年也金氏有國自此始焉 盖鷄林之稱者以金櫝掛樹梢而白鷄鳴於下之義取之也又按鷄林卽始林也先天下而朴氏始祖出焉後天下而金氏始祖又誕而鳥獸率舞人意歸王朴氏而十王昔氏而八王金氏而三十七王又有女王三世則歷傳年譜各從卽位元年計其薨年摁至于千年不足者八年也又按三國本史皆以先王薨年爲嗣王元年高麗臣金富軾撰三國史因以不革然其論曰夫人居卽位踰年稱元此先王不刊之典也以先王終年卽位稱元者非是矣我 睿宗朝史臣徐居正等纂三國史政以君薨明年爲嗣王元年故今於年譜亦以卽位踰年稱元而敢遵春秋一年不兩君之義焉 又按本史其君薨而無嗣則不嫌男女以年長嗣位故朴氏傳于昔氏昔氏傳于金氏三姓一心五十八世各以在位定爲年譜 又按本史國號或稱徐羅或稱斯羅或稱斯盧或稱新羅或稱鷄林而其君初稱居西干又稱次次雄又稱慈充或稱尼師今而至智證王定國號以新羅始爲稱王崔致遠作年代歷皆書王金富軾因本史直之權近作史略從致遠例亦皆書王盖欲變而尊王號也今於年譜亦以王號而年譜之述盖爲金氏同源非金氏王者不書
계림연보(鷄林年譜) 출어동원록(出於同源錄)
삼가 상고해보니 시조(始祖)께서는 탈해왕(脫解王) 9년(서기 65년 3월) 후한(後漢) 명제(明帝) 영평(永平) 8년에 탄생하시었다. 김씨(金氏)라는 성(姓)을 얻고 알지(閼智:알은 알이요 지는 존칭이다)라고 이름지어졌다. 탈해왕이 왕자(王子)로 삼아 기르고 계림(鷄林)으로 국호를 고쳤다. 벼슬은 대보(大輔:신라 초기 최고 관직)에 이르렀다. 신성(神聖) 자손들이 대대로 이어져 7대째에 이르러 미추(味鄒)께서 조분왕(助賁王)의 사위로서
첨해왕(沾解王)이 아들 없이 죽자 왕이 되었다. 즉위한 원년(元年)은 임오(壬午:서기 262년) 경요(景耀:초한 후제(後帝) 연호) 5년이다.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대개 계림이라고 일컬은 것은 금빛의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아래에서 울고 있는 것에서 취한 것이었다. 또 상고해보니 계림은 곧 시림(始林)이다. 이전에 박씨(朴氏) 시조가 탄생하고 이후에 김씨 시조가 또 탄생하니 새와 짐승들이 다 기뻐 춤추고 민심이 귀부하였다. 박씨는 10왕(十王)이고 석씨(昔氏)는 8왕(八王)이고 김씨는 38왕(三十八王)인데 그 중 여왕이 셋이다. 역대의 연대를 각각 즉위한 원년에서 그 훙년(薨年:왕의
죽음을 훙이라 함)까지로 합계해보면 모두 992년이 된다. 또 상고해보니 삼국본사(三國本史)에는 다 선왕(先王)의 훙년을 다음 왕의 원년으로 하였는데 고려(高麗)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三國史記)를 편찬할 때 고치지 아니했지만 그 사론(史論)에 이르기를 임금이 즉위하고 해를 넘겨 원년을 일컫는 것이 선왕이 정한 만고불변의 전칙이다. 앞의 임금이 돌아간 해에 즉위해서 바로 원년을 일컫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조선 예종조(睿宗朝)의 사신(史臣)인 서거정(徐居正) 등이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할 때 임금이 돌아간 이듬해를 후계왕의 원년으로 고쳤다. 그래서 지금 연보(年譜)에서도 즉위한 이듬해를 원년으로 계산함으로써 춘추(春秋)에서 한 해에 두 임금을 쓸 수 없다는 뜻을 따랐다.
또 본사(本史)를 상고해보니 임금이 훙(薨)하고 후사가 없으면 남녀에 구애되지 않고 연장자(年長者)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래서 박씨는 석씨에게 왕위를 전하고 석씨는 김씨에게 전하여 삼성(三姓)이 한마음으로 56대를 누려 각각 재위(在位)한 것으로써 연보를 정하였다. 또 본사(本史)를 상고해보니 국호(國號)를 혹 서라(徐羅)라고 하고 혹은 사라(斯羅)라고 하고 혹 사로(斯盧)라고 하고 혹은 신라(新羅:신은 음을 새의 취한 것
곧 새라)라고 하였다. 임금의 칭호도 처음엔 거서간(居西干)이라고 하고 또 차차웅(次次雄)이라 하고 또 자충(慈充)이라 하고 혹은 이사금(尼師今)이라 하다가 지증왕(智證王)에 이르러 국호를 신라(新羅)로 결정하고 비로소 왕호를 왕(王)이라고 일컬었다.
최치원(崔致遠)이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지금 불위(不位))을 지으면서 전부 왕이라 썼으나 김부식은 본사대로 썼고 권근(權近)이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을 때 최치원의 예를 따라 또한 전부 왕이라고 썼으니 대개 고쳐서 왕호를 존엄하게 하고자 해서이다. 지금 연보에서도 왕으로 쓰고 연보를 서술하는데 김씨로서 한 시조의 왕만을 다루었다. 김씨 왕이 아닌 이는 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