鷄林金氏始祖記 抄出
始祖姓金氏諱閼智昔脫解王九年漢光武中元二年乙丑春正月王夜聞金城西始林間有鷄聲遲明遣匏公見之有金色小櫝掛樹梢白鷄鳴於其下匏公還告王使人取櫝開之有小兒姿貌奇偉王喜謂左右曰此豈非天祚我以令胤乎名其兒閼智閼智方言小兒之稱以其出於金櫝故姓金氏改始林爲鷄林因以爲國號林中築石高三尺諺傳閼智解胎時置剪子石有刀痕在至七世孫味鄒娶助賁王女王無子味鄒代立金氏有國自此始傳王三十七世敬順王擧國而禮見麗王王乃受庭見之禮拜爲政丞位在太子之上國除爲慶州 敬順王影堂在府南鷄林天啓丙寅觀察使金時讓以姓孫巡到本府行祭影堂會鄕之姓孫議有司以修祀事歲以爲常
계림김씨 시조기
시조의 성은 김씨요, 휘(諱: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는 알지(閼智)니 석탈해왕 9년 후한 명제 영평 8년 을축(乙丑) 춘정월(春正月) 밤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가 아뢰니 왕이 사람을 보내 함을 가져다가 열어보게 했다.
그 안에 작은 아이가 있어 용모가 뛰어난데 왕이 기뻐하여 측근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게 훌륭한 후계자로써 복을 내림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알지(閼智:알지는 국어로 아기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한편 그 아이가 금빛의 함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로 성(姓)을 정해 주고는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고서 그대로 국호로 사용하였다.
숲속에 세자 높이의 돌을 쌓아놓은 것이 있는데 민간에 전하는 말로는 알지의 탯줄을 끊을 때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칼자국이 있다고 한다. 7세손(七世孫) 미추가 조분왕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왕이 무자하매 미추가 대신 왕이 되었다.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38세(三十八世)를 이어 왕이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예(禮)로써 회견하니 태조가 조정에서 알현하는 예를 받고는 정승(政丞)에
임명하니 지위(地位)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나라를 없애고 경주(慶州)로 만들었다.
경순왕의 영당(影堂:조상의 위패나 화상을 모신 집)은 시의 남쪽 계림에 있다. 인조(仁祖) 4년(四年)에 관찰사(觀察使:종이품 지금의 도지사) 김시양(金時讓)이 경주 김씨로서 경주를 순시할 때 영당에 제사를 지내고는 고을의 경순왕 후손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으니 실무자를 정해 제사 일을 주관하게 해서 해마다 상제(常制)로 지내도록 하였다.
鷄林金氏始祖記 抄出
始祖姓金氏諱閼智昔脫解王九年漢光武中元二年乙丑春正月王夜聞金城西始林間有鷄聲遲明遣匏公見之有金色小櫝掛樹梢白鷄鳴於其下匏公還告王使人取櫝開之有小兒姿貌奇偉王喜謂左右曰此豈非天祚我以令胤乎名其兒閼智閼智方言小兒之稱以其出於金櫝故姓金氏改始林爲鷄林因以爲國號林中築石高三尺諺傳閼智解胎時置剪子石有刀痕在至七世孫味鄒娶助賁王女王無子味鄒代立金氏有國自此始傳王三十七世敬順王擧國而禮見麗王王乃受庭見之禮拜爲政丞位在太子之上國除爲慶州 敬順王影堂在府南鷄林天啓丙寅觀察使金時讓以姓孫巡到本府行祭影堂會鄕之姓孫議有司以修祀事歲以爲常
계림김씨 시조기
시조의 성은 김씨요, 휘(諱:고인이 된 사람의 이름)는 알지(閼智)니 석탈해왕 9년 후한 명제 영평 8년 을축(乙丑) 춘정월(春正月) 밤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사이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 살펴보도록 하니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가 아뢰니 왕이 사람을 보내 함을 가져다가 열어보게 했다.
그 안에 작은 아이가 있어 용모가 뛰어난데 왕이 기뻐하여 측근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어찌 하늘이 내게 훌륭한 후계자로써 복을 내림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알지(閼智:알지는 국어로 아기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주는 한편 그 아이가 금빛의 함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로 성(姓)을 정해 주고는 시림을 고쳐 계림이라 하고서 그대로 국호로 사용하였다.
숲속에 세자 높이의 돌을 쌓아놓은 것이 있는데 민간에 전하는 말로는 알지의 탯줄을 끊을 때 가위를 놓았던 돌로서 칼자국이 있다고 한다. 7세손(七世孫) 미추가 조분왕의 딸을 맞아들였는데 왕이 무자하매 미추가 대신 왕이 되었다. 김씨가 나라를 차지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어 38세(三十八世)를 이어 왕이 되었다. 경순왕(敬順王)이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에게 예(禮)로써 회견하니 태조가 조정에서 알현하는 예를 받고는 정승(政丞)에
임명하니 지위(地位)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나라를 없애고 경주(慶州)로 만들었다.
경순왕의 영당(影堂:조상의 위패나 화상을 모신 집)은 시의 남쪽 계림에 있다. 인조(仁祖) 4년(四年)에 관찰사(觀察使:종이품 지금의 도지사) 김시양(金時讓)이 경주 김씨로서 경주를 순시할 때 영당에 제사를 지내고는 고을의 경순왕 후손들을 모아 놓고 의논했으니 실무자를 정해 제사 일을 주관하게 해서 해마다 상제(常制)로 지내도록 하였다.